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푸아 운동 (문단 편집) == 창설 == || [[파일:Talonpoikaismarssi.jpg|width=300px]] || || 헬싱키 중앙광장에 운집한 라푸아 운동 || || [[파일:K._J._Ståhlberg_and_Ester_Ståhlberg_in_Joensuu_after_kidnapping.jpg|width=300px]] || || 죽다 살아난 스톨베리 부부 || 1929년 핀란드 중부 포흐얀마(Pohjanmaa)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포흐얀마는 [[핀란드 내전]] 당시 백군을 가장 강력히 지지한 곳이었고, 내전이 끝난 지 10년이 넘도록 반공감정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21세기인 오늘날에도 매우 보수적인 편이라 중앙당과 국민연합당, 핀란드 기민당 지지율이 높고 사민당은 별로 환영받지 못한다.] 그러던 중 1929년 11월 남포흐얀마의 도시 [[라푸아]]에서 사회주의 청년단체가 집회를 열면서 교회, 애국주의, [[핀란드군]], 그리고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만네르헤임 남작]]을 조롱하는 선동구를 외쳤다. 이것에 자극된 지역 주민들이 맞시위를 일으켜 1천 명 이상이 모였고, 사회주의자들은 두들겨 맞아 쫓겨났다. 라푸아에서 시작된 이 시위는 전국으로 번졌고, 1930년 6월 이 "라푸아 운동가" 3천 명이 [[오울루]][* 북서해안의 도시로, 공업이 발달해서 내전 때도 포흐얀마에서 유일하게 적군 편을 들었다. 오늘날에는 북포흐얀마주에 속한다.]와 [[바사]]의 공산주의 신문사에 들이닥쳐 윤전기를 때려부쉈다. 그리고 각지의 운동가들이 수도 헬싱키를 향해 상경하기 시작했다. --하경이라고 해야 하나-- 7월 7일 1만 2천 명 이상의 우익 시위대가 헬싱키에서 가두시위를 벌였고, [[라우리 크리스티안 렐란데르|렐란데르]] 대통령은 이들의 요구에 따라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스빈후부드]]를 총리로 임명하고, 공산주의 성향의 집회결사 및 언론을 금지하는 "공화국 수호법"을 제정했다. 정당한 법적 근거를 얻은 라푸아 운동가들은 각지로 흩어져 400건 이상의 노조 집회를 폭력적으로 방해했다. 이들이 애용한 폭력수단은 무일루투스(muilutus)라는 것이었는데, 사람을 납치해서 두들겨팬 뒤 차에 실어 [[소련]] 국경에 갖다버리는 것이었다. 1930년 10월 4일에는 심지어 전 대통령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 부부를 납치해서 이 짓을 하려고 했다. 스톨베리는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전직 대통령 같은 국가 요인이 이렇게 피습을 당할 정도로 나라가 개판이었다. 1931년, 라푸아 운동가들의 지지를 받는 권위주의자 스빈후부드가 대통령이 되었고, 라푸아 운동의 기세도 하늘을 찌르는 듯 했다. 전 육군참모장 [[쿠르트 발레니우스]] 등 라푸아 운동에 동조하는 군부 인사들도 생겨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라푸아 운동은 이탈리아나 독일의 파시스트들처럼 국정을 장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clearfix]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